하나님의 자녀 > 칼럼

본문 바로가기

칼럼


하나님의 자녀

페이지 정보

KCHA 작성일2018-08-14 21:01

본문

하나님의 자녀(Ownership)

                            김 지영( 순천대학교 영상디자인학과 교수)​

 

부모들은 자신이 낳은 아이가 자신에게 속한 소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염색체로 자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외형을 보면 자신과 흡사하고 행동하는 것도 비슷하기 때문에 착각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자신의 분신이며 소유물이고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벌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자신이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대부분 타인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지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부모의 역할이란 하나님의 자녀를 맡아서 기르는 청지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소유권은 하나님이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지 인간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국가의 법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녀를 학대하고 때리고 가학을 가하면 생물학적 부모임에도 불구하고 자녀로부터 격리되고 심지어는 자신의 자녀를 빼앗기고 다른 사람이 양육하도록 합니다. 구타 등의 행위를 가했을 경우에는 친부모를 감옥에 가두기도 합니다. 또한 심지어는 자녀에 대한 양육권과 친권마저도 빼앗깁니다. 자녀가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요. 내가 내 소유물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닌가요? 이러한 경우는 동물의 세계에서는 종종 목격되는 것으로 자신의 새끼를 죽인다고 해서 별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사고에서는 아이는 엄연한 독립된 인격체이고 부모는 그 아이를 잘 양육할 권한이 있는 것이지, 소유할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기독교적 신앙에 근거한 것입니다.

 

-기독교적 신앙이 아닌 모슬림이나 아프리카의 일부 부족들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많은 모슬림 국가에서는 부모가, 또는 형제가 명예살인이라 하여 가족의 명예를 훼손하였을 때 자녀나 형제를 살해하기도 합니다. 이는 자녀에 대한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고, 자신의 소속물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일에 대한 예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너무나 사랑하였습니다. 그 아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선물로 아브리함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가서 바치는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녀이지만 이 자녀가 하나님보다 우선할 수 없고,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데려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입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며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22:10~12)

 

또한 욥도 욥기에서 그의 아들 10명이 죽었을 때 똑같은 말을 합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데려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

자녀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현대의 너무나 많은 부모들이, 심지어는 크리스챤 부모들까지도 자녀를 자신들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자신이 주관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지배하고자 합니다. 본인의 사고와 의지, 생각으로 아이를 양육하고 자신의 자녀에 대한 애정이 배타적인 성격을 띠어서 본인의 자녀가 아닌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심이나 긍휼도 보이지 않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아이가 자기와 자기 동생의 생일은 모두 같은 해 4월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쌍둥이인 줄 알고 물었더니, 자기의 생일은 410일이고 동생의 생일은 425일이라고 합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중 하나는 양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둘 중에 누가 양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둘이 빙그레 웃기만 합니다. 자기들도 그게 궁금하여 자신들의 아버지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자신들의 아버지가 글쎄, 나는 너희 둘을 똑같이 사랑하고 키우기 때문에 나도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생물학적 자녀와 양자를 어떻게 똑같이 키울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내 아이나 버려진 아이나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맡아서 기른다는 청지기적인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10:37)

 

생물학적인 형제자매가 아닌, ‘주안에서 형제자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믿는 사람들은 주안에서 형제자매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실천해야하지 않을까요? 나의 자녀와 똑같은 비중으로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자녀를 사랑으로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병원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본인이 병원에 입원하였거나 누군가가 입원하여 병문안을 간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와 혈연관계인 사람이 가장 중하고 우선이겠지요.

병원에는 사실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죽음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환자들이 있는데, 사소한 병으로 일반병동에 있는 환자가 불편함을 호소하며 계속해서 간호사나 의사를 불러 되고, 실제로 중환자를 내팽개치고 일반 환자를 더 돌본다고 한다면 맞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혈연과 친분이 있다고 하여 일반병동 환자에게 더 많은 관심과 보호를 기울이지는 않는지요. 일반병동의 환자가 어쩌면 과한 관심과 불필요한 보호를 받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들에 비해서는 위급한 상황은 아니지요. 나의 자녀에 대한 관심도 다른 자녀에 대한 관심과도 비유될 수 있습니다. 나의 자녀를 일반병동에서 불편함을 호소하는 것일 수 있으며, 이웃의 버려진 자녀는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메고 있는 것일 수 있지요.

 

오늘의 주제와 내용은 실천하기에 좀 어려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교적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한국적 정서에서 불효나 배은망덕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의 부모자식간, 형제 자매간의 많은 문제들을 보면 서로에게 너무나 많이 고착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부모의 경우, 부모가 자식에 대해 모든 것을 컨트롤하고 내 자녀니 내가 알아서 하니, 전혀 간섭하지 말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인이 되기까지 일정기간 맡아서 기르는 스튜어드쉽(청지기) 입니다. 주인의 자녀를 내가 맡아서 양육하는 것이므로 인격적으로 대해야 하고 자녀를 노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잘못된 버릇이나 나쁜 행동이 있으며 훈계하고 바로잡아야겠지요. 그러나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거나 혈기와 감정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지극히 삼인칭 시점으로 공정하고 정의롭게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녀도 나와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옛적에 부부가 싸움을 하거나 부모가 자녀를 학대하고 때릴 때,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어느 누구도 중재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영국, 북유럽과 같이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국가들에서는 자녀에 대한 스튜어트 쉽(청지기 정신)이 기조에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유교적사상의 우리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점차 선진국이 되어가면서 자녀나 부부에 관한 사항들을 인권이라 하여 점차 법률적으로도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지요. 그러나 이러한 인권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적 사상에 기반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부모든 자녀이든, 형제든 우리 모두는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